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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생활을 꿈꾸는 페미~ 이젠 성평등X노동을 고민할 때

(사) 한국여성노동자회
목표 금액3,000,000원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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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한국여성노동자회

프로젝트팀

(사) 한국여성노동자회는 1987년부터 활동을 시작하여 성차별이 일상화된 우리나라에서 일하는 여성이 행복해져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꿈꿉니다. 전국 11개 지부를 가지고 있으며 모든 지부가 성 평등 노동이 실현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여성들이 노동을 통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꾸려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일을 갖고, 이를 통해 경제적 자립을 이루며 노동의 보람과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세상을 꿈꿉니다. 안정적이고 안전한 노동환경과 사람답게 생활할 수 있는 임금, 평등한 승진과 배치, 교육을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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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팀 (사) 한국여성노동자회2020. 01. 03
[페미노동아카데미 수강자 신배경님] 2019 페미노동아카데미에 다녀와서_페미니스트에게 독립생존이란?

독립, 그리고 생존. 언제부터인가 삶을 살아간다기보다 버티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정서적인 독립과 더불어 경제적인 독립이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즉, 내가 나를 먹여 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20대에 사회생활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살아낸 시간을 돌아보니, 어느 순간부터 생존에 대한 두려움이 내 안에 있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중입니다.

'나'의 역사에서 톺아보는 가부장제

종갓집 장손을 아버지로 두고, 또 한 명의 종갓집 장손을 손 위에 두고 자라온 세월 속에서 보고, 듣고, 익힌 것은 '차별을 감내하기'였습니다. 집 안의 제사를 비롯한 대소사가 있을 때 마다 '가사노동자'인 엄마와 '딸'인 나는 집 안의 남성들이 제사라는 "그들만의 의식"을 잘 지낼 수 있도록 시중을 든 후에야 앉을 수 있었습니다. 사표를 낸 며느리와 B급을 단 며느리를 비롯한 한국 '며느리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내게는 '며느리'의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았습니다. 가부장제라는 틀 안에서 주체적 인간으로 도저히 발 디딜 틈 없는 여성의 서사. 나, 그리고 나와 관계 맺고 있는 여성들의 서사와 맞닿아 있었습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었던 온도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성별에 따른 불평등이 존재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겪는 부당함에 대해 표현 할 수 있는 언어를 찾고 싶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홀로 독립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녹록치 않은 현실입니다. 요즘처럼 생존이란 단어가 절실하게 와 닿은 적이 있었던가. "독립 생존"에 대한 준비를 고민하던 중 때마침 <페미노동아카데미>를 만났습니다.

[1강 돌봄민주주의: 독박도 기생도 아닌, 진짜 돌봄을 찾아서]

인간의 존재를 구성하는 조건 중의 하나인 ‘돌봄’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할까. 강사는 돌봄과 민주주의의 공통점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살아가게 한다, 함께 할수록 좋은 상태에 이를 수 있다, 자유로워야 행복하다, 평등해야 행복하다, 정의로워야 더 좋은 상태로 나아간다는 점을 제시하며 좋은 돌봄 실현을 위한 근본적 사회 변화의 필요에 대해 피력했습니다. 돌봄이 개인이나 ‘가족’이라는 단위에 전가되어있는 부담스러운 현실 앞에 ‘돌봄과 민주주의’라는 키워드는 하나의 나침반처럼 다가왔습니다. 돌봄 민주주의-자유, 평등, 정의에 대해 짚어보며 지금껏 ‘민주적 돌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떠올려보지 않았음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돌봄이라는 단어를 마주할 때 내 안에 떠오르는 힘듦이라는 느낌이 혹시 ‘누군가의 자유로 다른 이의 자유를 억압하는 돌봄에 대한 무임승차’ 때문이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돌봄으로부터 무임승차했는가?(자유)’, ‘누구든 평등하게 돌봄을 받고 있는가?(평등)’, ‘기존의 돌봄을 둘러싼 구조적 부정의를 개선하려는 노력하는가? 사적 돌봄의 불평등이 공적 영역의 불평등으로 재생산 및 악화되고 있지는 않은가?(정의)’ 세 가지 이슈를 마주하며 모든 ‘돌봄’은 ‘가족’의 책임으로 몰려있고, 그 안에서도 여성에게 치우쳐있는 현실이 ‘돌봄의 불평등’이라는 언어로 정리되었습니다. 강사의 표현대로 ‘노동시장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다운 삶에 대한 근본적 고민을 통해 가족, 지역사회, 국가가 함께 돌봄의 주체로 거듭나 안정적인 사회재생산 구조가 확립’되는 길은 결국 ‘모든 사람’의 인간다운 삶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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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박도 기생도 아닌, 진짜 돌봄을 찾아서> 강의 중

<독박도 기생도 아닌, 진짜 돌봄을 찾아서> 강의 중

<독박도 기생도 아닌, 진짜 돌봄을 찾아서> 강의 중

<독박도 기생도 아닌, 진짜 돌봄을 찾아서> 강의 중

[2강 젠더와 노동건강권: 페미니스트가 움켜진 노동자 건강권]

"건강이란 질병이 없는 상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완전히 안녕(well-being)한 상태“를 말한다고 합니다. 노동자 건강권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구조적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정책이나 제도가 부족한 현실이며 여성노동자들의 건강권에 대한 공론화도 필요하지만 정책결정의 권한을 가진 자리에 남성이 대다수임을 감안할 때 젠더관점에서의 논의가 ‘아직은’ 부족한 현실이라고 합니다. 직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알고는 있었으나 현장에 있는 강사를 통해 듣는 온도는 또 달랐습니다. 일례로 산재판정위원의 성비가 남성에 치우쳐있다면 여성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목소리는 적을 수 밖에 없습니다. 최근 이슈가 되었던 낙태죄 폐지의 경우 여성노동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폐지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하는 여성들이 어떻게 회복시간을 확보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점은 중요한 부분입니다. 자연유산의 경우 유산/사산휴가를 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일터에서 유산으로 인한 휴가계를 쓸 수 있는 문화가 정착되어있는지 의문입니다. 정책결정권자가 남성중심인 구조 안에서 여성노동자의 건강권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스웨덴처럼 페미니스트 정부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책결정과정이 평등한 젠더관점에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조직마다 성평등이사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나아가 성평등장관이 있어야한다는 생각은 개인적 바램이 아닌 시대적 요청이 아닐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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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가 움켜진 노동자 건강권> 강의 중

<페미니스트가 움켜진 노동자 건강권> 강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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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가 움켜진 노동자 건강권> 강의 중

<페미니스트가 움켜진 노동자 건강권> 강의 중

<페미니스트가 움켜진 노동자 건강권> 강의 중

<페미니스트가 움켜진 노동자 건강권> 강의 중

<페미니스트가 움켜진 노동자 건강권> 강의 중

[3강 혐오와 노동권: 혐오 받지/하지 않고 노동하기]

‘차별’은 불이익이 직접적으로 가해지지만, ‘혐오’는 행동보다 언어로 표현됩니다. 혐오표현은 차별을 조장하고 방조하는 일인데, 혐오의 피라미드를 보면 1차적으로 편견이 있고, 상황, 맥락과 맞물렸을 때 증오범죄로 나아가는 단계별로 구도화된 피라미드로, 연속적으로 발생한다고 합니다. 강사는 사람들의 편견, 혐오가 발현되는 경우를 지위가 하락하고 취약해질 때로 보았습니다. 자기 것을 지키려고 하면서 혐오할 대상을 찾는 경우로 정규직노동자들이 비정규직노동자들을 차별하거나, 난민반대시위 할 때는 국민이 먼저라는 구호를 외치고, 이주자의 경우 다문화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예로 들었습니다. 혐오는 문제의 본질을 흐리게 합니다. 진짜 싸워야할 대상에 대한 판단오류나 싸워야할 문제들이 있음에도 결집을 약화시키는 경우를 초래하게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노동문제의 경우 성별을 떠나서 ‘모든 노동자’들이 함께 싸워야하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여성혐오’이슈로 사태의 본질을 흐리게 할 수 있는 부분은 우려가 아닌 ‘혐오’가 지닌 독성에 대한 파악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편견은 혐오를 낳고, 혐오는 눈을 멀게 만듭니다. 일상에서의 편견이 일터에서의 혐오로 이어짐을 생각하며, 내 안에 자리한 편견들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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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받지/하지 않고 노동하기> 강의 중

<혐오 받지/하지 않고 노동하기> 강의 중

<혐오 받지/하지 않고 노동하기> 강의 중

<혐오 받지/하지 않고 노동하기> 강의 중

<혐오 받지/하지 않고 노동하기> 강의 중

<혐오 받지/하지 않고 노동하기> 강의 중

<혐오 받지/하지 않고 노동하기> 강의 중

<혐오 받지/하지 않고 노동하기> 강의 중

[4강 가족구성권: 혈연을 넘어, 의지와 실천으로 구성하는 가족]

'모든 사람은 가족 안에서 태어나고, 가족 안에서 죽고, 새로운 가족은 혼인을 통해서 만들어진다.'라는 문장이 자연스레 읽혀지던 시대는 저물고 있습니다. 이제는 가족의 의미에 대해, 가족구성원에 대한 새로운 관점에 대해 이야기 할 때이다. 아니, 이미 혼인과 관계없이 구성을 이루어 살아가고 있는 다양한 상황들을 새로운 형태의 ‘가족’으로 인정해야하지 않을까요. 사회복지제도는 가족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불평등, 특히 젠더불평등과 관련되어 있다고 합니다. 70년대 사회복지제도가 생기기 전에 국가는 노동력을 상품화 하면서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역할을 했는데, 그 당시 경공업중심으로 여성노동자들이 주된 노동력이었습니다. 70년대 경제구조가 중화공업으로 넘어가면서 여성노동자들은 사적인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남성노동자 중심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복지제도가 IMF 전까지 유지되었다고 합니다. 소득이 없는 가족구성원은 가부장적 가족구조 안에서 주로 남성 가장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고, 사회보험에서도 대상화되는 결과가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가부장적 가족구조는 이미 해체되기 시작한지 오래지만 국가에서 정한 사회적 혜택의 대상이 민법상의 가족범위 안에 들어야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구성원’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비혼 인구가 증가추세에 있는데 비해 정책은 한정적입니다. 강사는 고용관련 정책에서 가해지는 ‘가족상황차별’, 특히 여성의 경우 결혼이나 임신으로 인한 퇴사는 성차별, 고용차별, 가족상황차별이라고 지적하며, 국가가 시민임을 인정하고 ‘정상성’을 부여하는 방식이 가족 안에서 얼마나 보호받고 안정적인가를 통해 드러난다고 보았습니다. 우리가 ‘가족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정상가족의 대체’라는 의미에 한정지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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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연을 넘어, 의지와 실천으로 구성하는 가족>강의 중

<혈연을 넘어, 의지와 실천으로 구성하는 가족>강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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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연을 넘어, 의지와 실천으로 구성하는 가족>강의 중

<혈연을 넘어, 의지와 실천으로 구성하는 가족>강의 중

<혈연을 넘어, 의지와 실천으로 구성하는 가족>강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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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강 성평등과 노동: 마녀, 성평등X노동을 외치다]

'나'를 둘러싼 세계, '여성'을 억압하는 구조였습니다. 역사 안에서 여성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구축한 구조 안에서 개별주체로 서는 기회를 박탈 당하고 가부장제+자본주의가 원하는 '여성성'을 강요받아왔습니다. 이번 강의에서 국가가 여성의 자기 신체에 대한 권리를 부정하고 있음을 설명했는데, 최근 헌법불합치 판결이 난 낙태죄의 경우, 국가는 낙태가 필요한 시기에는 적절히 눈감으며 여성의 재생산권을 통제해온 역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자기결정권을 국가가 '대신' 관리하고 통제하려는 억압의 구조가 여성에게 국한되어 있다는 것은 명백한 '불평등'입니다. 여성에 대한 불평등이 기저에 깔려있는 흐름 안에서 여성의 노동 또한 평가절하 되어왔습니다. 강의 내용에 따르면, 각 직종에서 여성을 배제시킨 '동업조합 운동'과 여성의 외부 활동을 금하고, 남편을 돕는 방식으로만 생산에 참여할 수 있다는 '동업조합법령'을 통해 사회생활의 영역에서 여성을 소외시켰습니다. 남성의 노동과 여성의 노동에 대한 '차별'은 산업화와 함께 시작되었는데,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 남녀 임금차별을 보여주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1970년대 경공업 수출산업의 비중이 컸던 한국의 경제 성장은 여성의 임금을 낮추어 수출상품의 단가를 낮추고, 성별 임금불평등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강사가 예시로 들었던 사례 중, 직원 5명 규모였던 가발공장 <YH무역>은 3천여명의 직원을 거느린 규모로 급속도로 성장하였습니다. 강사는 당시 수출산업부문 여성노동자의 비중이 50~70%였는데, 이때의 성별임금격차는 48.5%에 달한다며, 이는 여성노동자들의 임금 착취로 이루어진 결과라고 지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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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성평등X노동을 외치다> 강의 중

<마녀, 성평등X노동을 외치다> 강의 중

본문에 들어간 이미지입니다.

현재는 어떨까요? 2018년 경제활동인구조사에 따른 통계를 보면 한국 여성 노동자의 50%이상이 비정규직이며, 월 임금총액 또한 남성노동자의 절반 수준에 그치고 있다고 강사 배진경은 지적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 성별에 따른 차별은 산업화 이후 지금까지 임금을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게다가 여성노동자들이 겪는 성차별은 임금차별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IMF 당시 해고 0순위가 여성이었다는 점,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에 기반하고 여성을 '가정'의 영역에 두며 시간제 일자리를 만드는 등 한국 임금노동의 역사 속에서 여성노동자들은 부당해고-불안정한 상황으로 내몰려온 것입니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손잡은 '여성통제'는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며, 여성의 노동은 여전히 평가절하 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성은 가정주부인 무급의 돌봄 노동 제공자로, 남성은 생계부양자인 유급의 노동자로 인식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의 노동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그림자 노동으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일하지 않는 것처럼 아이를 돌보아야 하고, 아이가 없는 것처럼 일해야 하는 것은 일과 육아를 병행해야하는 대다수 여성들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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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성평등X노동을 외치다> 강의 중

<마녀, 성평등X노동을 외치다> 강의 중

<마녀, 성평등X노동을 외치다> 강의 중

<마녀, 성평등X노동을 외치다> 강의 중

<마녀, 성평등X노동을 외치다> 강의 중

<마녀, 성평등X노동을 외치다> 강의 중

<마녀, 성평등X노동을 외치다> 강의 중

<마녀, 성평등X노동을 외치다> 강의 중

"여성은 왜 전 생애에 걸쳐 차별받아야 하는가?" : 해답을 찾아가기 위해

<페미노동아카데미>의 문을 두드리는 계기가 되었던 내 안의 생존에 대한 두려움의 실체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과 배제를 경험한 나의 의식과 무의식의 집합체라는 사실을 이번 강의를 통해 직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라는 문장이 "여성도 사람이다."라는 급진적인 주장이라는 표현이 있을 만큼, 내가 속한 사회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지 않습니다. 강남순 교수는 '21세기 페미니스트 철학'이라는 책에서 "역사성에 대한 철저한 인식은 역사에 대한 책임적 개입을 의미한다. 한 인간으로서의 여성이 역사적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인간이 '역사에 의해' 구성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역사를' 구성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의식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페미노동아카데미>가 끝나고 며칠 뒤 "희망버스"에 올라 강남역 삼성해고노동자 김용희 님, 이재용 님과의 만남 후에 서울요금소로 향했습니다. 캐노피 위에서 투쟁 중인 6명의 여성노동자들이 마주보고 있는 한국도로공사 건물에는 "사람 중심의 스마트 고속도로"라는 문구가 커다랗게 걸려있었습니다. 6명의 여성노동자들은 매일 매 시간 그 문구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서울요금소 캐노피 위에서 투쟁 중이던 6명은 지난 10월5일 98일 만에 땅을 밟고, 곧바로 김천 한국도로공사본사 농성장에 합류하였다.)

<마녀, 성평등X노동을 외치다> 강의 중

<마녀, 성평등X노동을 외치다> 강의 중

왜였을까요. 전에 만난 적 없고, 이름도 알지 못했던 생면부지의 여성노동자들 앞에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캐노피 위에서 손을 흔드는 6명을 뒤로 하고, 김천 한국도로공사 본사 정문을 막아선 방패 너머로 농성중인 여성노동자들 몇 분과 겨우 눈을 마주치고, 다시 영남대 의료원으로 출발하여 옥상에서 해고자 고공농성 중인 박문진, 송영숙 님을 위한 연대집회에 참여했습니다. 그날 서울에서 김천으로, 영남까지 하루 종일 돌며 만났던 노동자들은 두 명을 제외하고 다 여성노동자들입니다. 왜 그들은 캐노피 위에, 옥상 위 난간에 올라 목숨을 건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지난 강의를 통해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여성노동의 가치를 평가절하 하고, 여성을 착취하고 있음을 배웠다면, 이번 현장에서 만난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통해 내가 발 딛고 있는 세상에서 여성노동자들의 노동을 어떻게 대우하고 판단하는지 여과 없이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노동자들의 여러 투쟁현장에서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가 "사람답게 살고 싶다"입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가르치는 이 사회에 "모든"의 범주에 대해서 묻게 됩니다. 동시에 나는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역사에 의해 구성된 구조적 차별과 배제에 대해 역사적 존재로서 주체적 목소리로 "그것은 아니다"라는 외치는 소리에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라는 나의 목소리를 건네고 싶습니다.. 토머스 머튼의 말을 빌려 "당신은 또 다른 나"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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