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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의 봄

광화문 광장을 지켰던 세월호 천막이 4년 8개월만에 철거됩니다. 아이들의 영정이 거리로 나온 이후 다섯 번째 봄입니다. 벌써 그렇게나? 하고 잠시 하늘을 올려봅니다. 이제는 힘에 부친다는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월호는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여전히 더디고, 그 슬픔을 붙잡고 있는 마음은 더 버겁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낡은 천막을 치우는 일은, 이제 억지로 그날을 떠올릴 필요가 없다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따뜻한 일상의 한 자리에 세월호가 있어준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돌아보면 제가 참여연대에서 활동한 지난 5년도, 세월호를 침몰시킨 그 숱한 이유들과 싸우는 일이었습니다. 권력과 유착, 관행과 부패, 은폐와 탐욕. 세월호 안에 모든 것이 집약되어있었고, 그래서 분명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2014년, 활동가로서 첫발을 디딘 저에게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광화문 리본

광화문 리본

#배가 침몰했대

“배가 침몰했대” 수다를 떨던 동기 한 명이 입을 열었습니다. 금방 구출되겠지 생각했습니다. 대화는 오래가지 않았고, 우리는 금새 다시 웃었습니다. 그날 저는 난생 처음 피켓을 들었고, 사람들을 불러세우고 유인물을 나누어줬습니다. 2014년 4월, 참여연대에 입사한 저는 세상이 좀 더 좋아지기를 바라는 신입활동가였습니다. 나중에야, 그 날 세상이 크게 침몰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웃고 떠들고 먹던 그 날 하루종일 세월호라는 배에 탔던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소리치고 두드리고 울고 있었다는 것을. 배 안의 소리는 밖으로 나오지 못했고, 배 밖의 사람들은 기울어가는 배를 지켜봤습니다. 304개의 세상이 가라앉는동안 바깥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2014년 서울역, 세월호 특별법 서명 캠페인

2014년 서울역, 세월호 특별법 서명 캠페인

#거대한 거절

304명의 죽음은 하나의 사건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304번 반복된 것이라는 말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압도적인 슬픔일진대, 우리는 배 안에 갇힌 사람들이 구조되지 못하고 가라앉는 현장을 실시간으로 지켜봐야 했습니다. “왜?”라는 질문은 당연했습니다. 유가족은 주로 길에 있었습니다. 팽목항에서, 청와대로 향하는 길목에서, 방송국 앞에서, 국회 앞에서, 그리고 광장에서, 그들을 ‘막아서는’ 것들로부터 밀려났습니다. 그들이 앉으면 우리도 앉고 그들이 일어서면 우리도 일어섰습니다. 우리는 속칭 ‘전문시위꾼’이었지만 길 위에서는 유가족이 항상 앞이었습니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함께하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을 유가족이 지켜주고 있었습니다. 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가눌 수 없는 슬픔의 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용감해져야 했을까. 저는 거대한 슬픔이 그토록 견고하게 거절당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물대포와 최루액과 방패와 차벽이 저들의 언어였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아서 다시 비극이었습니다.

2015년 4월 4일, 유가족 거리행진

2015년 4월 4일, 유가족 거리행진

#말이 아닌 말

배가 기울기 시작했을 때 선내 방송에서 “가만히 있으라”라 수차례 지시했고, 배가 이미 전복되었을 때 MBC와 MBN과 YTN이 “단원고 학생 324명 전원구조”라고 보도했으며, KBS 보도국장은 “세월호 희생자 수가 연간 교통사고로 치면 그리 많은 수는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최초 보고를 받은 후 7시간이 지나 현장에 도착해 “구명조끼를 입고 있는데 구조하기가 힘드냐”고 되물었고, 사건 한 달이 지나 대국민담화를 통해 “해경을 해체 하겠다”고 발표했고, 일 년 뒤 기자간담회에서는 “대통령으로서 할 것은 다 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국정조사 자리에서 대통령의 사라진 7시간에 대해 당시 새누리당 조원진 의원은 대통령의 “사생활”이라고 칭했고, 같은 당 정유섭 의원은 “대통령은 놀아도 된다”고 말했으며, 김재원 당시 새누리당 의원은 세월호특별조사위를 두고 “세금도둑”이라 비판했고, 같은 당 김진태 의원은 실종자 수색작업에 “돈이 너무 많이 든다”고 했습니다. 김순례 현 자유한국당 최고위원은 당시 세월호 유족들의 진상규명 요구를 ‘시체 장사’에 비유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말은 칼이 되어 남겨진 사람들을 할퀴었습니다(우리는 그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말들을 견뎌낸 건 기필코 진실을 밝혀내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가족들에게 그것은 단순한 다짐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유였습니다. 배가 왜 침몰했는지, 왜 구조하지 않았는지, 대통령은 7시간 동안 무얼했는지, 수사 과정에 무엇이 은폐되고 날조되었는지, 언론 오보의 원인은 정확히 무엇이고 유가족 사찰은 누가 왜 지시했는지 분명하게 알아야만 했습니다.

2014년 7월 15일 세월호 특별법 제정 서명 전달

2014년 7월 15일 세월호 특별법 제정 서명 전달

#부끄럽지 않으려

세월호 1주기를 앞두고 유가족은 머리를 잘랐습니다. 삭발식이었습니다. 600만 명의 염원이 모인 세월호특별법이 국회와 정부를 거치며 반쪽짜리 법안이 되어있었습니다. 진상규명이 제대로 될 리 없었습니다. 비판 여론이 커지자, 정부는 불쑥 배상금을 말했습니다. 그들에게 세월호는 '돈'이었거나, 그것으로 끝나야 족했습니다. 진실이 또, 잠기려 했습니다. 엄마 아빠는 단원고 학생증을 목에 걸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얼굴 위로 엄마 아빠의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떨어졌습니다. 삭발은 목숨을 내놓겠다는 의미라고, 이미 죽은 목숨이지만,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려 살아있는거라고, 원하는 건 오로지 진실이라고, 절규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 염치없게도, 끝까지 함께해달라고 아이들에게 빌었습니다. 가야할 길이 한참이었습니다.

2016년 6월 27일 특조위강제종료규탄

2016년 6월 27일 특조위강제종료규탄

#지금 다시, 함께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는 집요한 방해와 음해 속에서도 의미있는 성과를 거뒀습니다. 특조위가 개최한 3차례의 청문회는 참사의 원인과 구조실패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진상규명은 이제 시작입니다. 지난해 12월, 본격적으로 조사에 돌입한 2기 특조위(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역할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2017년 4월 10일 참여연대 노란리본 전시

2017년 4월 10일 참여연대 노란리본 전시

진실을 인양해내는 힘은 시민들의 관심을 딛고 커집니다. 혹시, 노란리본을 아직 달고 계신가요? 지금 다시, 리본을 달아주세요. 그리고 참여연대와 우리의 기억을 단장하는 일에 함께해주세요. 이 봄의 이름을 다시 불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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