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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 마라톤? 힘들지 않을까요?”라고 물으면 “죽어가는 4대강 보다 더 힘들까요?"라고 답할 것이다

“4대강을 마라톤 종주 한다구요? 너무 힘들지 않을까요?”라고 물어온다면 나는 “죽어가는 4대강 보다 더 힘들까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여 “4대강 종주는 미국 횡단( 5100km)의 연습일 뿐입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저는 요즘 밤마다 10~20km 씩 마라톤 연습과 자전거를 타고 있습니다. 제가 미국 횡단을 계획하는 이유는 ‘지구에서 종이컵을 몰아냅시다’ 캠페인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연습을 위해서 ‘4대 강 살리기’ 캠페인 울트라 마라톤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런 미친 짓에 가까운 무모한 도전을 하게 되었는지 설명들 드리기 위해서 14년 전 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저는 대전에 사는 53세의 평범한 소시민 김창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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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춘천 마라톤 참가

2016년 10월 춘천 마라톤 참가

2017년 동아마라톤

2017년 동아마라톤

81세 김진환 어르신, 63세부터 364회 풀코스완주

81세 김진환 어르신, 63세부터 364회 풀코스완주

13회 이상 풀코스를 뛴 친구 재국이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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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km 청남대 울트라마라톤 출발~

100km 청남대 울트라마라톤 출발~

울트라마라톤, 잠 안자고 밤새 달리는 중

울트라마라톤, 잠 안자고 밤새 달리는 중

새벽 1시에 먹는 야식은 정말 꿀맛

새벽 1시에 먹는 야식은 정말 꿀맛

상쾌한 새벽공기를 가르고...

상쾌한 새벽공기를 가르고...

16시간 제한시간 중 15시간 30분에 결승점 통과

16시간 제한시간 중 15시간 30분에 결승점 통과

1. 2004년 내가 환경운동에 뛰어들어야만 했던 이유?

공자님이 마흔을 ‘불혹(不惑)’이라 했던가? 나는 2003년 3월 서른아홉수를 지독하게 넘기고 불혹의 마흔에 이르러 세 가지 깨달음을 얻고 모든 미혹함이 사라졌다. 그 깨달음의 첫 번 째는 ‘나는 이 땅에 내 뜻으로 오지 않았고 그래서 내 뜻대로 살 수도 없고, 내 뜻대로 떠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전지전능한 존재가 어떤 목적을 이루기위한 도구로서 나를 창조했기 때문에 나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죽고 사는 문제의 두려움과 나만의 욕심을 채우지 못해서 조바심 하는 일들이 사라졌다. 두 번 째는 ‘나는 전지전능한 존재의 특별한 창조목적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만든 불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전지전능한 존재로부터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지음 받은 완전한 작품이기 때문에 내 모습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타인과 비교하지 않게 되었고, 있는 그대로 나를 사랑하게 되었고, 내 마음 속에서 울림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흔들리지 않고 자신감있게 밀고 나갈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셋째로 ‘밀폐된 지구는 하나의 물의 순환으로 말미암아 태어 나고 죽는 하나의 생명체다’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내 몸의 70%를 이루면서 흐르던 물이 몸 밖으로 빠져 나가 강으로 바다로 흘러가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물이 증발하여 구름으로 하늘을 떠돌면서 지구 저편의 모든 생명 속에 머물게 되어 지구에 모든 생명은 한 생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로 내 몸이 지구와 한 몸이라는 것이 느껴지면서 지구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이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실천하게 되었다. 그 실천 방법 중에 하나로 1회용품 사용으로 인한 쓰레기 문제가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다. 길가에 모아 둔 매립될 쓰레기를 보면 마음이 아파오고, 내 머리를 파고 쓰레기를 매립하는 듯 한 기분이 들어서 환경운동을 실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2. 2004년 3월 판촉용 컵을 선물 받은 후 변화 된 삶

2003년 이전에는 학습지 방문교사로 일을 하면서 수학을 지도했는데 불혹이 지나면서 내 앞에서 수학공부를 하는 아이들이 행복하지 않은 표정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아이들이 행복한 수학을 개발하자’라는 생각이 들어서 학습지 회사를 퇴사한 후 일상 생활용품과 재활용품을 수학교구로 활용하는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멀쩡하게 버려지는 생활쓰레기 문제가 정말 심각하다는 것을 더욱 더 실감하게 되었다. ‘이렇게 쓰레기가 넘쳐나는 시대에 도대체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하는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2004년 3월경에 판촉용 스테인리스 컵을 선물 받게 되면서 ‘아하! 이 컵만 가지고 다니면 하루에 2~3개씩 쓰던 종이컵을 안 쓸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날부로 가방 항상 환경컵(판촉용 컵)을 매달고 다니면서 종이컵을 쓰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컵을 가방에 매달고 다니면서 종이컵 안 쓰기를 1년 정도 실천하고 나니 ‘조금 불편하기는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컵을 가지고 다닌다면 종이컵이 사라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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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에 매달고 다니는 환경컵

가방에 매달고 다니는 환경컵

배포하는 환경컵

배포하는 환경컵

지구를 살리는 가방속 소지품

지구를 살리는 가방속 소지품

컵과 함께 나누어주는 책갈피

컵과 함께 나누어주는 책갈피

3차 행군때 제작한 현수막

3차 행군때 제작한 현수막

3차 행군, 구미역에서 현수막을 걸고 컵을 나누어 줌

3차 행군, 구미역에서 현수막을 걸고 컵을 나누어 줌

3. 2005년 4월부터 환경컵을 무료로 나누어 주다.

나는 2004년부터 ‘재활용품을 활용한 수학지도법’을 전국의 문화센타와 도서관으로 강의를 하러 다녔는데 수강자들에게 컵을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물론 공짜로.... 초등수학지도법을 주제로 강의를 하기는 했지만 수학보다 더 중요한 자녀교육에 관한 이야기와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함께 이야기 하면서 ‘지구에서 종이컵을 몰아냅시다’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종이컵을 안 쓰겠다는 서명을 받고 컵을 나누어 주었다. 그렇게 2005년과 2006년, 그리고 2007년이 되면서 2,500여 개를 나누어 주었는데도 세상은 변화의 기미기 보이지 않았고, 나 개인의 발버둥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다른 방법을 고민하시 시작했다.

4. 2007년 10월 '조롱박 父子'의 4차 행군이 시작되다.

2007년 가을 초등 3학년인 아들에게 ‘우리 대전에서 바다까지 걸어가 볼까?’라는 제안을 하자 아들 영규는 ‘바다까지요? 그래요 정말 재밌겠네요’라는 말을 했다. 그렇게 아들과 함께 환경캠페인 행군이 시작되었다. 행군에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는데 한 가지는 ‘내 아들의 호연지기는 내가 기른다’였고, 또 한 가지는 ‘지구에서 종이컵을 몰아냅시다’ 라는 타이틀의 환경 캠페인을 세상에 알리고자 함이었다. 다행이도 초등 3학년의 철없는 아들이 흔쾌히 승낙(?)을 했기에 환경컵을 나누어 준다는 의미의 ‘조롱박 父子’ 별명을 스스로 붙이고 대전에서 금강하구까지 걸어간다는 환경캠페인 내용을 여러 일간지에 제보를 했다. 그 중에 유명한 일간지 기자가 행군 하루 전날 대전으로 찾아와서 영규와 함께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우리는 대전에서 금강하구(77km)까지 행군 지도를 들고 2007년 10월 11일 오전 9시 그 첫 걸음을 떼었다. 오른 손은 아들의 손을 잡고, 등에는 배낭을 지고, 또 배낭 위에는 ‘지구에서 종이컵을 몰아냅시다. 대전~군산 행군’이라는 현수막을 걸고 걸었다. 나는 육군으로 입대하여 전투경찰로 차출되어 근무했기 때문에 행군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아무런 정보가 없었기에 겂도 없기에 행군의 요령도 모른 채 미리 준비한 지도의 도로 갓길을 따라 금강하구를 향해서 무작정 걸었다. 첫날은 대전의 한 복판인 태평동 아파트 집을 출발해서 오후 8시가 넘어서 논산 가기 전에 개태사 인근의 여관에서 잠을 잤다. 그리고 아침 8시 30분 경에 출발하여 전북의 함열을 향해 걸어가는데 이른 오후까지는 걸을만 했지만 해가 지기 시작하는 6시가 넘어가면서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무릎도 아프고 발가락 사이에 물집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저녁 8시가 넘어 갈 무렵에는 영규가 거의 기어가다 시피 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점점 추워지고, 나는 배낭을 메고 있어서 영규를 업을 수도 없었고, 10여미터 가다 쉬고 가다 쉬고를 반복하면서 영규는 점점더 지쳐서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멋모르는 시작한 첫 행군이 나 역시 너무나도 힘들었고 '이거 아들 잡는거 아닌가?' 하는 후회가 생겼다. '과연 금강하구까지 갈 수 있을까?' 두려움이 까지 생겼다. 우여곡절 끝에 9시 30분이 다 되어서 전북 함열이라는 곳의 여관에 들어 갈 수가 있었다. 나는 바로 욕조에 물을 틀고 여관 방 구석에 내 던지듯 짐을 팽개친 후 우리 둘은 따뜻한 물이 채워진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이 너무 좋았다. 나는 영규에게 물었다. “영규야 힘들지?” 하니 “네 죽을만큼 힘들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래 아버지도 너무 힘들다. 그렇지만 앞으로 아버지는 서울도 걸어가고, 부산도 걸어가고, 미국도 횡단할껀데 영규는 어떻게 할래?”라고 물으니 영규는“아버지께서 외로우실까봐 말동무 해드릴께요”라는 대답 했다. 죽을만큼 힘들다는 초등 3학년 아들 입에서 그런 대답이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에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벅차오르고 나도 모르게 두 눈가가 뜨거워 지면서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목욕을 마치고 나서 발다락 사이에 생긴 물집을 치료한 후 바로 배낭에 달려있던 현수막을 침대 위에 펼쳐 놓았다. 그리고 “영규야 아버지는 나중에 돈을 많이 벌기는 하겠지만 절대로 돈을 유산으로 물려주지 않을 꺼야. 돈 대신 이 현수막이 아버지가 물려주는 유산의 전부란다.”라고 말을 하니 영규는 진지하게 “네”라고 대답을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행군을 많이 한 육군 출신의 친구에게 1차 행군의 고생을 말했더니..."45분 걷고 15분 쉬면서 행군을 하면 하루 10시간도 거뜬히 걸을 수 있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2차 서울 행군을 고민하던 중 행군에 대한 두려움이 자신감으로 확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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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행군 출발(대전~군산)

1차 행군 출발(대전~군산)

영규의 아픈 발목

영규의 아픈 발목

두번째 날 너무나 피곤한 모습

두번째 날 너무나 피곤한 모습

나도 좀 쉬자

나도 좀 쉬자

드디어 금강 하구 도착

드디어 금강 하구 도착

2차 행군 대전시청앞 지인들과 찰칵~

2차 행군 대전시청앞 지인들과 찰칵~

에구 목말라~

에구 목말라~

3차 행군 대전역 출발 부산역을 향하여 홧팅~

3차 행군 대전역 출발 부산역을 향하여 홧팅~

너무 피곤해~

너무 피곤해~

부산역에서 컵 배포중

부산역에서 컵 배포중

5.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서울성화봉송주자를 거절하다.

무사히 1차 행군을 마치고 다시 일상에 돌아와 생활을 하면서 2차로 대전~서울 행군준비를 하던 2007년 11월에 세계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글로벌 음료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중국에서 환경올림픽을 지향하기 때문에 지난 해 10월에 일간지에 '조롱박부자 환경캠페인 행군'에 대한 기사를 보았으며, 본 음료회사에서 베이징올림픽 서울성화봉송주자 5명을 추천할 수 있는 스폰서 회사이기 때문에 일반인 중에서 나를 성화봉송 주자로 추천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흔쾌히 승낙을 했는데 2008년이 되면서 유럽쪽 여러 나라에서 인권탄압국가인 중국의 베이징올림픽 개최를 반대하는 뜻으로 성화봉송을 거절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서울에서는 2004년 4월 25일이 성화봉송하는 날이었는데 4월초 모 일간지 신문에 중국의 경찰이 티벳의 승려를 곤봉으로 내리 치기 직전의 뒷모습 사진이 신문에 대문짝 만하게 실려 있었고 그 사진 위로 일제 강점기를 겪은 우리 할아버지들의 고초가 오버랩 되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성화봉송에 대한 갈등을 이야기 하니 대부분 "가문의 영광 아냐? 그냥 뛰어"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일제와 같은 인권탄압국가인 중국의 올림픽 횟불을 들고 앞장서서 뛴다는 것이 내 양심이 허락치 않았다. 그래서 고민 끝에 나는 나를 추천했던 음료 회사에 성화봉송 거절에 대한 장문의 글을 정중하게 써서 이메일로 보냈다. 그렇게 나는 국내 성화봉송주자 80명 중 1호로 베이징올림픽 서울 성화봉송을 거절하게 되었다. 그 사실이 일간지에 기사화 되면서 2008년 7월 베이징올림픽을 반대하는 세계인권성화 릴레이에서 성화봉송주자로 뛰어달라는 요청이 들어와서 국내 1호 주자가 되어서 영국의 로이터 통신과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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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성화릴레이 성화봉송주자로 뛸 준비를 하는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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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성화봉송 1번 주자로...

인권성화봉송 1번 주자로...

인터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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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가 아니라 거절인데?

포기가 아니라 거절인데?

일제강점기 우리 할아버지들의 고초를 연상케 한 그 사진

일제강점기 우리 할아버지들의 고초를 연상케 한 그 사진

6. 제 유산이 하나씩 늘어나네요^^

나는 평소와 같이 강연을 할 때마다 환경컵을 나누어 주었고, 영규 역시 다른 사람들이나 태권도 학원에서 종이컵에 주는 슬러시 같은 것을 먹지 않으면서 종이컵 안 쓰기 운동을 나름 열심히 동참 했다. 계획대로 나는 2차 대전~서울 행군을 준비하면서 환경컵 300개를 준비하여 대전시청에서 출발하면서 100개를 나누어주었다. 2008년 4월 18일에 출발해서 서울시청에 23일에 도착하여 200개의 환경컵을 서울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3차 행군으로 2008년 가을에는 대전역에서 출발하여 5개 역을 거쳐서 부산역에 도착하는 동안 500개의 환경컵과 함께 환경보호에 대한 내용이 적힌 책갈피를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3차 행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대구역에서 ‘KBS세상의 아침’ 촬영 팀에서 촬영을 마치고, 밀양에서 아침을 먹으면서 방송을 보았는데 밀양 이후로 부산까지 가는 동안 방송을 본 사람들이 우리가 지나는 것을 보고 '아침에 TV에서 봤어요' 하시면서 과일이나 음료를 주시고, 영규에게 만 원짜리 용돈을 쥐어주시면서 많은 격려를 해주셨다. 3차 행군에서도 영규는 기대 밖으로 나에게 감동을 주는 고백을 들었는데 “저는 아버지를 참 잘 만난 것 같아요”와 현수막 가리키며 “유산이 하나씩 늘어나네요”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그 다음 4차 행군으로 2009년 4월 25일부터 7일 동안 243km의 제주도 일주를 무사히 마쳤다. 내가 태어나서 한 일중에서 가장 잘 한 일이 있다면 영규와 국내 4차 행군을 한 일이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다. 나의 4차 호연지기 프로제트가 성공하면서 영규는 사춘기도 없이 잘 지냈고, 올해는 인간과 자연을 소중히 여길줄 아는 새내기 대학생(대구교원대)이 되면서 기대이상으로 잘 자라주었다. ** 영규의 대입 자기소개서 일부 끝부분에서 저에게는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들이 스스로를 존중하고, 타인을 이해하고, 자연을 마음에 품게 해준 최고의 인성교육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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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서울 행군 중에 불탄 숭례문 앞에서..

2008년 4월 서울 행군 중에 불탄 숭례문 앞에서..

본문에 들어간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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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졸업식장에서 엄마랑~

고등학교 졸업식장에서 엄마랑~

누나와 함께 대천 어항 바다를 배경으로~

누나와 함께 대천 어항 바다를 배경으로~

운전 면허를 따고 운전을 하는 영규

운전 면허를 따고 운전을 하는 영규

교생참관실습을 위해서 양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영규

교생참관실습을 위해서 양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영규

영규에게 물려준 유산(2차 행군)

영규에게 물려준 유산(2차 행군)

영규에게 불려준 유산(1차 행군)

영규에게 불려준 유산(1차 행군)

7. 여전히 세상이 변화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또 다른 과격한(?) 시도를 하다

2005년부터 컵을 나누어주고, 2007년부터 환경캠페인 행군을 하면서 5000여개의 컵을 나누어 주어도 세상은 여전히 변화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획기적인 캠페인을 기획한 것이 바로 ‘누드퍼포먼스’였다. 2012년 5월 서울 시민들이 많이 모이는 명동, 올림픽공원, 홍대앞, 여의도공원 등 8군데에서 코데카(종이컵으로 성기를 가린 복장)차림으로 종이컵으로 지구 모양의 둥근 구조물을 만드는 퍼포먼스를 했다. 퍼포먼스를 하는 중에 서명을 받고 500개의 환경컵을 무료로 나누어주었다. 특히 코데카 차림으로 서울시청에서 광화문까지 걸어가던 중에 경찰들에 에워싸고 옷을 입으라는 요청을 거절하자 경찰서로 연행되어 과다노출 경범죄로 즉결심판통지서를 받았지만 법정에서 나는 내 환경운동의 취지를 당당하게 스스로를 변호하면서 무죄로 풀려났다. 법원 정문을 걸어 나오면서 “나는 지구에서 종이컵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해서 퍼포먼스를 할 것이다”라는 다짐을 했다. 혹자들은 누드퍼포먼스가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을 한다. 하지만 옷벗는 일이 뭐 대수랴? 나는 내 '목숨'과 '지구에서 종이컵이 사라지는 일'을 바꿀 수 있다면 나는 추호의 주저함 없이 바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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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청에서 광화문까지 걸어가던 중

서울시청에서 광화문까지 걸어가던 중

서울 시청앞 광장

서울 시청앞 광장

책갈피 배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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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쪽으로 향하여..

광화문쪽으로 향하여..

경찰에 에워 싸이고...

경찰에 에워 싸이고...

경찰서 행

경찰서 행

즉결심판에서 무죄 판결문을 받고 법원을 나서면서....

즉결심판에서 무죄 판결문을 받고 법원을 나서면서....

8. 종이컵이 내 손 안에 오기까지 어떤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면 사람들은 절대로 종이컵을 안 쓸 것이다.

서울에서 누드퍼포먼스 하는 동안 벌어졌던 일들을 13분짜리 다큐로 만들어서 유투브에 올렸다. 유투브의 맨 마지막 장면에서 ‘종이컵과 종이제품들을 만들기 위해서 지구에서 축구장 크기의 숲이 사라지는 시간은 1초, 숲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면서 숲 속에서 살던 원주민들이 태양의 자외선에 많이 노출이 되어서 눈이 먼다’는 자막이 올라간다. 나 하나 편하자고 쉽게 쓰는 종이컵으로 인해서 1초마다 사라지는 축구장 넓이의 숲과 눈이 머는 원주민들, 그리고 황폐화 되어가는 지구, 오염되는 공기, 미래 우리 후손들이 써야 할 나무 자원을 생각한다면 종이컵을 쉽게 쓰지 못할 것이다. 1회용품을 사용하는 것은 후손들에 대한 우리의 합의된 범죄이다. 내가 하는 운동이 바로 삼불운동이다. 삼불운동은 ‘부족하게, 불편하게, 불결하게 살자’이다. 지구는 나의 일생만을 위한 일생용품이 아니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우리 선조들이 지구에 발자국만 남기고 갔듯이 우리 역시 아무 흔적을 남기지 말고 살다가 떠나야 하는데 우리는 하루에도 어마어마한 양의 쓰레기를 남기고 살아간다. 우리가 버린 쓰레기는 과연 어디로 갈까? 태평양에는 한반도의 7배에 달하는 지도에 없는 대륙이 떠다니고 있다. 이것은 바로 플라스틱쓰레기 대륙인 것이다. 점점 커가는 쓰레기 대륙은 누구의 책임인가? 바로 나의 책임인 것이다. 내가 변하지 않는 한 세상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변했으니 이제 세상을 변화시킬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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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로니에 공원에서...

서울 마로니에 공원에서...

서울 올림픽 공원

서울 올림픽 공원

서울올림픽 공원

서울올림픽 공원

서울 올림픽공원

서울 올림픽공원

서울올림픽 공원

서울올림픽 공원

서울시청에서 광화문쪽으로...

서울시청에서 광화문쪽으로...

홍대 근처

홍대 근처

서울역, 환경컵 배포중

서울역, 환경컵 배포중

명동에서...

명동에서...

여의도 공원 환경컵 배포중

여의도 공원 환경컵 배포중

9. 나는 반드시 환경캠페인을 위한 미국횡단을 성공할 것이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수 년 전에 미국유학을 다녀온 아는 형님과 대화를 나누던 중에 “저는 앞으로 환경캠페인을 하면서 5100km 미국횡단을 할 예정입니다.”라는 말을 하니 형님은 “야 미국 땅이 어디라고 횡단을 해? 그러다 죽어”라고 손사래를 치면서 말을 했다. 그래서 나는 “그래요? 내가 이루고자 하는 뜻을 품고 그 일을 수행 하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일 만큼 멋진 일이 또 있을까요?”라고 답하자 형님은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환경캠페인을 통해서 지구의 모든 생명들의 행복을 돕는 일이 내가 이 땅에 태어난 이유이고 사명이다. 내 몸뚱아리가 내 창조목적에 따라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도구로 쓰여져서 닳아 없어지는 일만큼 감사한 일이 또 있을까? 어차피 나는 ‘내가 이 땅에 온 이유가 나를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너무나 명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사명을 다하는 과정에서 죽고 사는 것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다. 또한 결과론적으로 내가 사명을 이루어 내는 것 또한 별관심이 없다. 나는 다만 몸이 사명의 도구로써 쓰여지는 과정으로써 충분하다. 아들 영규와 1차 행군을 마치고 나서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사자성어가 떠올랐다.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기겠노라고 호기를 부리는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물으니내가 산을 옮기 시작하면 내 아들이 옮기고, 손자가 옮기고, 또 증손자가 옮기다보면 산은 자라지 않고 그러다보면 산을 옮길 수 있지 않겠냐는 논리다. 내가 내 이름을 걸고 반드시 성공할 필요는 없다. 내가 환경캠페인을 시작하면 내 아들이든 다른 사람이든 누군가가 그 사명을 이어받아 행할 것이고, 행하다 보면 지구에서 종이컵이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이다. 난 일단 목숨이 다 하는 날까지 환경캠페인을 계속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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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제주 행군 중에...

4차 제주 행군 중에...

4차 제주 일주 행군 중

4차 제주 일주 행군 중

4차 제주 일주 행군 중

4차 제주 일주 행군 중

4차 제주일주 행군 중

4차 제주일주 행군 중

4차 제주일주 행군 중

4차 제주일주 행군 중

10. 2017년 가을부터 시작하는 4대강종주 마라톤캠페인은 미국횡단 캠페인의 연습이다.

나는 2015년~2017년까지 춘천마라톤과 서울국제마라톤 풀코스를 4번 완주를 했다. 그리고 2017년 4월에 대청호를 한 바퀴(100km) 도는 청남대울트라마라톤을 완주했다. 울트라마라톤을 완주하고 나니 장거리에 대한 자신감이 조금 생기게 되어서 2007년 영규에게 1차 행군 때 약속한 ‘미국횡단’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실현 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올해 2017년 가을을 시작으로 금강종주(146km)를 성공한 후 2차로 2018 봄 한강종주(192km), 3차로 2018년 가을 영산강종주(133km), 4차로 2019년 봄 낙동강종주(324km)를 계획하고 있다. 그리고 2020년에 미국횡단(5100km)환경캠페인 행군을 할 것이다. 나는 분명 지구에서 종이컵을 몰아내고, 1회용품의 사용을 현저하게 줄이는 일에 기여할 것이며 이로 인해 노벨상평화상을 받아달라는 요청이 올 것이다. 하지만 나는 노벨평화상 수상을 거절 할 것이다. 거절 사유는? “누구나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11. '금강종주 마라톤' 지원 자전거 봉사자를 모집합니다.

저는 2017년 9월 1일(금)에 대청댐에서 오전 9시에 출발해서 금강하구둑까지 146km를 20여시간 동안 잠을 안자고 뛸 예정입니다. 제가 금강을 종주하는 동안 사진과 동영상을 찍고 음식을 지원해주실 자전거 지원자를 모집합니다. 관심있으신 분은 연락주세요. (대전, 김창현:010-6517-5056)

2008년 10월 3차 행군 대전역~부산역(13일)

2012년 5월 서울 누드퍼포먼스 중에...

12. 최종 나의 꿈

저는 소박한 꿈 네가지가 있습니다. 1) 세계 모든 나라의 수학교과서에 재활용품수학학습법(RIM) 등재시킨다. 2) 지구에서 종이컵을 몰아내고, 1회용품의 사용을 현저하게 줄인다.(미국횡단행군) 3) 돈이 없어도 행복한, 모둔 생명들이 행복한 지구를 만든다. 4) 노벨평화상을 거절한다. 이 네가지 꿈이 소박한 이유는 이미 제 마음속으로는 다 이루어진 미래 완료형 꿈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앞으로 작은마을학교를 통해서 제가 이루지 못하면 저의 자녀, 저의 제자들이 제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하게 할 것입니다. 제 나이는 올해 53세 입니다. 앞으로 저는 97년을 더 살아서 150세가 될 때까지 제가 이루고자 하는 모든 꿈을 다 이루고 멋지게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 때까지 저를 지켜봐주세요.^^

테드에서 강연한 재활용품수학(RIM) 관련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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